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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렘 1

1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제사장 가문 출신이네요. 2절은 유다 왕 요시야 13년에서 시드기야 십일년 말까지라고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고 활동한 기간에 대한 정보를 줍니다 (주전 627년부터 580년사이).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 중, 주전 606년에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1차 소환되고, 이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같이 끌려 갑니다. 주전 597년엔 2차 포로 소환이 되며 시드기야가 꼭두각시 왕 (파피 킹) 으로 세워집니다. 결국 주전 586년에 남유다과 완전 멸망하고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이 시작됩니다.
4-19절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부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소명에 예레미야는 슬퍼하며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모세가 소명 받을 때 그랬던 것과 유사합니다. 주께서 그의 입에 주의 말씀을 주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하며 구원할 것이라” 고 하시면 두려워하지 말고 사명을 다하라 명령하십니다.
주께서 명령하시면 능력없어도 자격없어도 무서워도 Go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살구나무 환상과 끓는 가마 환상을 통해 유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하실 것을 보여 주십니다 (11-16).
예레미야 선지자의 사명의 핵심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린 후 건설하고 심게 하는 것” 입니다. 구원은 받으시 완전한 심판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죄인이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할 심판을 남김없이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자는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을 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며, 믿는 것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인지를 안다면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사명 역시 힘든 일입니다. 파괴하고 다시 세우는 사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렘 2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이방의 우상들을 섬기며, 스스로 죄 없다 자고한 유다 백성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택하시고 장자를 삼으신 (3) 이스라엘 (여기선 유다)이 이토록 하나님께 패역할 수 있단 말입니까! 통탄할 노릇입니다.
유다는 총체적으로 타락했고, 그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 율법사와 정치 지도자들인 관리들까지도 영적으로 무감각하였고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5-8).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섬긴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섬기며 교회는 너무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세상보다 더 한곳이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유다의 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과 터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12-13). 세상 사람들이나 교인들이 세상의 부와 힘과 재미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의하시는 악은 “자기 하나님을 버리고 마음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입니다 (19). 우리가 생각하는 악은 하나님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일 뿐입니다.
26-37절은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여 그들이 당하는 환난에서 구원받고자 했던 행위들에 대한 심판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적인 힘, 사람, 권세나 자신의 그 무엇까지도 그 의지하는 것을 버림으로서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십니다 (37). 그러니 언제나 위기의 때에, 고통과 환난의 때에 우리 주만 의지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렘 3

유다의 반역을 간음한 여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여러 남자들에게 파는 창녀에 비유합니다. 유다가 하나님을 떠나 여러 나라의 우상들을 섬기고 그것들을 의지한 행동을 말하는데, 여호와께서는 그런 영적 간음을 한 유다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하십니다 (1-5).
6-10절 역시 유다의 행음 (다른 신을 섬김) 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6절은 3장의 배경이 요시야 왕 때 (b.c 640-609) (왕하 22-23장) 라는 정보를 줍니다. 이런 시기를 배경지식으로 깔고 읽으면 내용 이해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행음하였듯이 그 자매격인 유다 역시도 주께 돌아가지 않고 행음하였습니다.
이사야서처럼 여기서도 하나님의 회복의 말씀이 이중 성취 또는 복합 성취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된 말씀은 예수님의 구속 사건으로 마음이 새로워진 믿는 자에게서 성취된 내용들임과 동시에 종말에 이루어질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은 유다가 주께 돌아오기를 애타게 촉구하는 사랑의 메시지임에 분명합니다. 이토록 패역한 백성임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목놓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판의 메시지 속에 절절이 전해집니다.
23-25절: 지겹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끊도 없는 불순종과 하나님을 망각하고 배역하는 패역함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토록 그들을 사랑하시는 겁니까? 왜 이토록 오래 참으시면서 회유하고 설득하시고 호소하시고 간청하시는 하나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서 간음하는 여인같은 유다를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다시 돌아와서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입니까? 아, 그분의 무조건적이며 끊없는 사랑!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그분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신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렘 4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목할 것은 4절에서 유다인들의 마음의 할례를 받을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근본적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건 불가능합니다. 거듭남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돌아 가더라도 다시 배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마음의 할례가 일어납니다. 새 마음 (heart), 새 영을 가져야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1-4).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신 이유도 그들이 돌아와서 심판을 면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10).
11-18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북방에 나라 (바벨론)를 통해 심판하실 것임을 다시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의 악과 악한 생각을 제거하고 구원을 받아라고 초청합니다.
눈물의 선지자라른 별명을 가지 예레미야의 슬픔과 눈물과 탄식입니다. 장차 유다가 당할 심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민족의 아픔을 끓어 안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19-22).
하나님의 진노로 황폐하게 된 유다의 참삼인데, 천지 창조 이전으로 돌아간 것과 유사합니다 (23). 유다가 당한 심판의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당할 심판은 전쟁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3가지 도구인 칼, 전염병, 기근의 3대 재앙 중 칼 (전쟁)에 의한 것입니다.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이유는 유다가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주께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며, 나라를 자신의 도구로 삼으시기도 하시고, 버리기도 하십니다. 세상의 강대국과 강한 왕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들의 흥망 성쇠와 개인의 인생사까지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계획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전되다가 종말을 맞이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4:15에서 단에서 에브라임 산이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 전체가 심판을 받을 것임을 말합니다.

렘 5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처럼 예루살렘에도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어 용서받지 못하고 심판 받았습니다. 총체적 타락, 총체적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롬 3:9-10).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범죄하는 데 사용합니다 (7).
그들의 성적 타락을 적나라게 드러냅니다 (7, 8).
하나님의 말씀이 패역한 백성들을 불살라 심판합니다. 말씀이 검입니다. 구원하는 말씀이지만 심판하는 칼입니다.
15절 언어를 못 알아듣는 민족을 그들이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방언을 이런 심판의 개념과 연결시킵니다. 교회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건 공동체내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로 모였을 때는 통역하는 사람 없ㅇ면 방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심판 가운데에서도 진멸하지 않으시고 남은 자를 두실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18). 이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어 갑니다. 이들이 여자의 후손의 계보를 타고 흘러가는 자들입니다.
바벨론은 세상, 음녀와 같습니다. 세상의 신이며 물질, 부와 명예와 권력과 성공의 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성공을 신으로 섬김니다. 장차 바벨론 왕국에 의해 당한 심판의 모습을 여기서도 그려주고 있습니다 (14-20).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유다 백성들에게 공포하면서 그들의 타락상을 보고 두려움에 빠질 정도입니다 (30-31).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고, 주의 백성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는 죄악상입니다. 백성들이 거짓 지도자들의 행위를 좋아했기에 그들은 영적 지도자들은 거 착취하고, 속이고, 패역할 수 있었습니다.
작금의 한국 교회가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할 수 있는 이유는 교인들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판 없는 구원의 메시지, 공의없는 사랑, 고난없는 영광의 다른 복음을 전할 때 더 많은 영적 소비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지금 이 모양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가 너무 어둡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는 교회가 어둡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말처럼 참으로 무섭고 놀라운 일입니다!

렘 6

1-8: 예루살렘의 악으로 인해 멸하실 것이니 돌이키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9-15: 유다의 만연한 죄악 상과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 단단한 마음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10절: 유다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자기들에게 하시는 욕으로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은 충격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무시했으면…이런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취급했을까요? 하나님을 안 믿은 것입니다. 없는 존재로 여긴 겁니다.
그들의 총체적 죄는 종교 지도자에서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만연해 있었습니다 (13).
16-21
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온 의지를 다해 안 듣겠다고 거부하였습니다. 아무리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해도 그들은 평안하다라는 거짓 메시지를 발산하며 외면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 입니다 (19).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며 거룩한 것 선한 것 영적인 것들로 늘 채우려고 수고해야 될 이유입니다.
22-30
마침내 북방에서 온 나라 (바벨론) 의 군대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예고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한 자들인지 구구절절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 오래 참으시며 지속적으로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끝끝내 듣지 않을 때 그들을 버리시고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버려 아들을 심판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자는 언젠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심판의 부활이며 멸망을 위한 부활의 날입니다. 그때가 갑자기 찾아오기 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렘 7

주께서 새벽부터 유다에게 말하고 불러도 그들을 귀를 막고 듣지 않았으며 그들의 길과 행위에서 돌이켜 바른 길, 옛적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13). 그들은 성전이라는 외형에 가서 예배 의식만 준수하면 하나님께 구원 받을 줄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10). 주께서는 그들의 길과 행위가 온전할 때 그들의 종교적 예배도 받으신다고 하십니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은 정의를 행하고 (정직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 하지 아니하며 (사회적 약자를 착취하거나 차별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돌봄),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공정한 재판, 중상 모략이나 위증 금지, 살인과 폭력) 삶을 말합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과 사회적이며 공적인 삶, 세상에서의 섬김과 돌봄, 도덕적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비, 자선, 구제, 긍휼, 정의, 정직과 같은 덕성들은 참된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런 것들이 있을 때 우리의 예배도 하나님께 받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이런 삶이 담보되지 않은 채 종교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외식을 가증히 여기며 그의 면전에서 추방시키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른 삶이 없는 많은 교인 수와 큰 예배당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 은 하나님 앞에서 사상누각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치실 것이며, 강도의 소굴이 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예수께서 하셨듯이 채찍을 들어 정화시킬 것입니다.
16-28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우상 숭배와 죄악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분노와 심판을 철회하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십니다 (16). 이스라엘과 유다는 출애굽때부터 아무리 말해도 주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패역한 자들이었음을 고발하십니다. 자손들은 조상들의 심판받음을 거울 삼아 돌이켜야 하는데 후손들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더 큰 반역과 불순종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삶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도 규정과 규칙을 깨뜨리고 ㅜ상을 두며 더럽혔고 자식을 인신 제사로 드리는 끔직한 일가지 자행했습니다 (30). 이런 악행은 하나님 조차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라고 표현 할 정도입니다 (31).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시는 게 더 이상할 따름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참혹하게 심판하실 것을 다짐하십니다 (32-34).
이 모든 예언은 바벨론 침공으로 예루살렘과 유다가 초토화되고 성전이 불타고 유다의 모든 지도자들 귀족들과 주민들이 (일부는 남겨 두지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감으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런 심판의 모습은 종말에 모든 인간들이 받을 최후 심판의 참상을 미리 보여 줍니다. 이때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모든 율법 다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이 모든 심판에서 제외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위안입니다!

렘 8

심판의 참상은 죽은 시체의 뼈 조차도 추스릴 사람도 없고 추스려 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여길 정도입니다 (1-2).
그들이 받은 심판의 형벌은 자초한 것입니다. 그들이 주께 돌아가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5).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을 말씀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7).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위기의 때에 평강이라고 속이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강만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10-11).
18-22: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당할 심판을 자신이 받는 것과 동일시 하며 그들이 돌이키지 않고 결국 심판 당하는 것을 슬퍼하고 마음이 상하며 고통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타락과 무너짐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마음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지적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자리에서 나와 우리의 죄로 끌어안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간구하는 것이 이 시대 교회와 성도의 사명일 것입니다.

렘 9

유다 백성들의 죄악상에 대한 고발과 그로 인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결의와 심판의 참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슬퍼하는 예레미야 (1).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 라는 별명을 가지 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심판의 경고를 더 많이 하였습니다. 용맹, 대담, 강함 심령을 가진 선지자이기도 합니다.
24절: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주 하나님을 아는 것
26절: 결국 이 땅의 모든 인간은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기에 그리스도 없니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단어나 구 설명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21): 가나안의 바알 숭배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바알이 전쟁을 승리하게 해 주었다고 믿으면 바알 신을 위해 창문이 많이 달린 신전을 건축했습니다. 이 창문에 매달려 바알에게 구원을 요청하던 자들이 처참하게 죽게 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살쩍은 깍은 자들” (26): 머리 둘레를 각는 풍습이 있는 아라비아 유목민을 가리킵니다. 이런 풍습은 우상 숭배와 연관 되어 있기 대문에 레 19:27에서는 이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렘 10

1-11: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세상의 문화, 세상의 신을 배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것들은 다 사람이 만든 우상일 뿐입니다. 아이러니 하죠. 사람이 만든 사람의 피조물인데, 그 피조물을 자기들이 섬길 뿐만 아니라 진정한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경배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10절의 말씀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
12-16: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우상의 헛된 실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17-25: 유다의 멸망과 심판을 예고와 탄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렘 11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유다의 죄악상을 드러내고 그들이 불순종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11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 관계를 들어 그들의 죄와 받을 심판을 말합니다. 역시 이 모든 경고는 그들이 언약의 말을 듣고 순종하기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6-8).
18-23: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그를 죽여 없애려는 계획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씀만을 전하고 가르치신 예수님을 신성 모독이라 하면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재현됩니다. 동일한 유다 백성들이 선지자를 없애려는 시도는 같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죽여 (영적으로) 말씀을 없애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이 수용을 거부하고 말씀의 씨앗이 심겨지지 않도록 심겨진 것은 뽑아버려 열매맺지 못하게 합니다.

렘 12

예레미야는 일단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는 전제를 두고 악인의 형통에 대해 하나님께 탄원하며 그들을 벌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1-4). 하나님께서 그리 하심은 유다의 많은 목자들 (지도자들) 이 하나님의 소유인 포도원 (이스라엘)을 황폐하게 하였기에 주께서 그들을 버리시고 치신 것이라 말씀합니다.
훗날 예수님의 시대에 유다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의 복제품처럼 똑같은 상황이 재연됩니다. 그때는 그들에게 쏟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참 이스라엘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으셨습니다. 십자가 구속은 자신의 아들을 뽑고 우리를 심으신심판과 구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한 이웃 나라들을 멸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14-17).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기에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도 인내하고 견디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13절은 에덴 동산의 저주와 같으며, 학개 2장의 저주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이 아무리 수고해도 물질적으로는 번성할지라도 영적으로는 가시와 엉겅퀴가 가득해 열매맺지 못해 결국 찍어 불태워질 인생이 될 것입니다.

렘 13

계속해서 유다의 멸망을 예고하고,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선포의 방법이 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허리띠를 가지고 실물 예언을 하게 하십니다 (1-11). 이사야도 그랬고 에스겔 선지자도 자신의 몸으로 혹은 행동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메시지의 강렬함과 생생함이 최고였음데도,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완악함을 능가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백성 삼아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셨던 주의 열정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11).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교회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12-14에서 교만한 유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회개를 촉구하지만 그들의 변하지 않은 악함으로 인해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15-27).
이 장에서 한 번 더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행한대로 갚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형벌을 대신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 유다 백성과 다를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습니다 (요 3:3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받는 것입니다.
23절은 이스라엘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마음과 영의 새 창조가 있기 전에는 그들이 구원받을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에 대해 그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구약의 신실한 백성들은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게 될 날 (렘 31:31) 을 학수 고대했습니다.

렘 14

여호와가 사용하시는 세 가지 심판의 도구인 칼, 기근, 전염병 중, 가뭄으로 인한 심판 예고 (1)와 참상에 대한(2-6)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선지자는 하나님께 회개와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 구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7-9).
10-12절부터는 선지자의 간구에 대한 응답인데, 또 다시 백성들을 위해 복을 구하지 말라고 강한 심판의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11). 13절은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메시지를 탄식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이며, 이어서 여호와께서 대답하십니다 (14-18). 자신이 보내지 않은 자는 거짓 선지자이며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닌 거짓 평안이었습니다. 주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과 그말을 들은 백성들을 함께 칼과 기근에 멸망하실 것이라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은 오늘날 가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사와 교회들에 심각한 경종을 울립니다. 번영신학, 신비주의, 카톨릭 영성 신학, 은사주의, 신령주의, 신사도와 같은 물탄 복음, 다른 복음, 섞어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주님 앞에 반드시 서게 될 날을 두려워하며 돌이켜야 하며, 더 이상 하나님의 양떼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 집단적으로 배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잘 분별해야 하며, 저 또한 늘 바른 복음과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17절엔 패역한 자기 백성들에게도 여전히 사랑을 접지 않으시고 애태우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구구절절 녹아 있습니다.
19-22절의 내용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죄로 회개하고 애통하며 용서와 구원을 간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과 하나님의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기초로 구원을 호소합니다. 주기도문의 1-3번째 청원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렘 15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제는 모세와 사무엘과 같은 구약의 대선지자들의 중보기도조차도 듣지 않으시고 유다를 반드시 멸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이들이 멸망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6). 이젠 하나님도 뜻을 돌이키기에 지치셨습니다 (6). 참 비극입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면 우셨던 우리 주님이 떠 오릅니다. 하나님은 궁극의 선지자 아들의 중보기도는 들으셔서 아들을 통해 뜻을 돌이켜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유다 왕 중에 므낫세 왕의 죄가 가장 극악했는데, 그는 유다 백성들의 죄의 전형이며 상징입니다.
10-21절은 예레미야와 하나님과의 주고 받는 대화입니다. 선지자는 유다가 당할 재앙을 슬퍼하며 그 가운데서 주의 돌보심을 의뢰하고 있고, 여호와는 그를 구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21).

렘 16

주의 심판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주께서는 선지자에게 결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만큼 유다가 당한 심판의 재앙이 끔찍할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104).
유다는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심판하시는 겁니까? 라고 따져 묻습니다. 적반하장입니다 (10).
그러나 여기서 메시지가 끝나지 않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하실 그 날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14-15).

렘 17

유다의 죄가 얼마나 영구적인지를 비유를 틀어 설명합니다 (1). 자녀들까지 우상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2). 부모가 하나님 경외하지 않는데 어찌 자녀들이 하나님 신앙을 가지겠습니까?
하나님은 죄를 범한 죄인에게 진노합니다. 맹렬히 타는데 영원히 타는 불입니다 (4).
시편 1편, 신명기의 언약과 같은 사상이 반복됩니다 (5, 7). 주를 힘으로 삼지 않고 사람과 다른 강한 것들과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당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결실하기를 그치지 않듯 늘 푸름의 인생 살게 될 것입니다 (5-8).
성경의 인간론은 전적 부패, 전적 불능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 이라는 가르칩입니다.
12-18절은 예레미야의 간구입니다. 선지자는 주를 몹시도 경외하며 의지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내용 중에는 악인을 심판해 달라고 탄원하는데 이는 성도를 신원해 주실 것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해서 최후 심판때 악인을 제거하셔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기를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서 유추해 보면 당시 유다백성들은 안식일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음을 봅니다. 비즈니스, 매매와 같은 상거래를 안식일에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 명령과 말씀을 망각했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 쯤으로 가벼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19-27절: 안식일 준수하지 않는 유다의 실태와 안식을 준수시 받게 될 복의 약속 (24-27) 에 대해서 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구약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내적 신앙의 외적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 점거 기준표가 되었을 것입니다.
25절은 요한계시록 22장의 환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죄인들에게 맨 먼저하신 일이 유다백성들이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 준수 여부는 그들의 영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매 주일 예배와 교회 모임을 통해 주일을 잘 살아내지 못하면, 하나님 없는 자리로 나아가며 세상의 우상을 숨기며 사는 이방인처럼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합니다.
시대적으로 주일에 일을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 되었고, 쇼핑, 여가와 여행들을 주말을 통해 가는 일들은 신자들조차도 일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No Sunday (Sabath), No God!
B.B. Warfield 신학자의 말입니다. 사탄은 전략적으로 오늘날 탈 현대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양새입니다들 (불신자 마찬…) 의 초점을 흩어버리고자 합니다. 사탄은 이미 큰 성공을 거두어 가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온전한 주일 성수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따라감이 필요할 것입니다.

렘 18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을 말하면서도 백성들의 반응에따라 토기장이처럼 정하신 뜻일지라도 돌이키실 분이심을 전합니다. 그들의 돌이킴을 촉구하지민 유다는 둗지 않습니다. 자기들에게도 제사장 , 지혜자, 선지자가 있으니 예레미야는 입을 다물게 하려고 죽이려고 모의를 합니다.
이런 악한 계략을 간파한 선지자는 이번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예고대로 집행해 주실 것을 탄원합니다.
돌변한 선지자의 태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눈물의 선지자가 냉혈안이 된 것일까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절대 주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며 자신이 당할 재난 앞에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훗날 예수의 말씀을 거부하며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로 현현^^ 합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이 죽으심으로 예레미야의 기도가 응답되었드고 이제 예수를 거부한 자는 선지자의 기도대로 될 것입니다.

렘 19

토기장이에게 산 옹기를 백성들 앞에 깨뜨리는 실물 예언을 합니다. 이젠 하나님의 심판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때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들의 죄는 온갖 우상 숭배와 그들의 풍습에 따라 아들을 인신제사로 바알에게 바치는 천인공노의 범죄를 저지루고 있습니다. 그토록 선지지를 통해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했건만 그들은 불가능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에워싸여 굶주림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잡아 먹고 친구를 잡아 먹는 참상이 일어날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악은 바닥이 없습니다. 허나님이 붙잡던 손을 놓는 순간 인간 스스로ㅑ 만들어가는 지옥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개입, 마음과 영까지 새롭게 하실 은혜를 갈망하게 됩니다.

렘 20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의 예언때문에 그를 때리고 목에 나무 고랑을 채웠습니다.
그의 거짓예언과 선지자를 핍박한 것에 대해 그가 받을 형벌이 참혹하지만 그대로 됩니다.
<예레미야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선지자가 핍박받는 이유입니다. 목회자의 말씀 선포의 내용이 예레미야가 선포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심판과 구원입니다. 목사의 사명이 진정 이런 것이라면 목사 되려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들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기를 기도하지만, 쓰임 받는 것이 예레미야와 같은 삶이라면 참으로 소수만이 “주여 나를 사용하여 주소서” 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14-18절
욥이 고난과 고통 중에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고 원망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해 받는 고난받는 선지자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의 인생이 얼마나 내외적으로 큰 고통을 수반하는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결국 욥의 고난과 예레미야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에서 완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욥과 선지자와는 달리 “차라리 태어나지 말 것을” 이라고 구하지 않으셨고, 십자가에서 죄인을 구하시려고 죽으시는 사명을 향해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렘 21

시드기야 왕이 나오니까 예루살렘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이거든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다가 위기 때는 구해달라고 찾는 전형적인 기복신앙입니다. 엄밀히 말해 기복 신앙의 본질은 자기를 숭배하는 우상숭배입니다 (1-2).
바벨론에게서 구해달라고 기도를 간청한 시드기야 왕에 대해 예레리먀의 응답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진멸입니다 (7). 그 가운데서도 살 길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9). 그들이 멸망한 것은 칼 (침략) 뿐만 아니라, 기근과 전염병에 의해서 였습니다. 이런 심판에 살아 남은 자들이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남겨져 회복의 씨로 남게 됩니다.
계속해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성품은 악행 (죄악)에 대해 분노하시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들과 지도자 역시 정의와 공의로 재판하고 다스릴 것을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12).

렘 22

선지자의 예언의 시기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서 거꾸로 올라감니다 살룸 (여호아하스) (11), 여호야김 (18), 고니야 (여호야긴) (24) 때의 유다와 왕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레미야서는 시간 순으로 배열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여러 장들을 묶어서 구성되어 있어 복잡하고 배경을 이해할 때 주의가 필요합니다.
1-9: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의 사회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들의 신앙의 타락은 사회 정의가 무너짐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회 정의를 아주 강하게 강조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루어 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회 정의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일치시킵니다.
9절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왜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지 (당했는지)를 한 줄로 요약합니다.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까닭이라”.
교회가 쇠퇴하는 또는 무너지는 이유도 동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세상이라는 암몬 (세속주의)을 섬길 때 하나님의 교회는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됩니다. 복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때문에…
13-19절: 여호와김 왕의 죄악과 당할 심판
14절: 부정, 부패, 경제 정의 파괴와 사치의 사회의 실상을 드러냅니다.
사회 정의, 약자 돌봄, 공평한 삶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일치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16).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건, 지금 우리가 속한 사회와 가정과 교회에서 약자를 돌보며, 정의를 구현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가 하나님 앞에서 형통한 사회이며, 형통한 삶입니다 (16-17).
21절: 회개하지 않아 단단해진 심령이 이렇습니다. 불순종도 습관입니다.
24-30: 여호야긴 왕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그는 불과 3개월동안만 왕위에 앉았다가 바벨론에 끌려가 거기서 오랜 시간 머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살리셔서 그를 바벨론에서 회복시키시고 그의 자손을 통해 메시아가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헤세드 (인자, loving kindness) 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완성된 곳이 십자가입니다. 언약을 마침내 성취하시고 주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언약에 성실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렘 23

23장 전체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과 주의 양 떼를 죽이려는 이리같은 거짓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내용인 요한복음 10장과 매우 유사합니다.
1-8절은 다시 미래의 왕 메시아를 통한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입니다. 양과 목자로 비유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한 목자로 예언합니다. 5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아 예언입니다. 여기서 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진 날입니다.
9-32절은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의 악행과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의 내용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내의 종교 지자자들의 실상과 너무 흡사합니다. 간음, 거짓, 악의 조장과 카르텔화 되어 있는 슬픈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14).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1) 헛된 가르침입니다. 자기 마음에서 메시지가 나오며, ‘평안하다’ 라고 하며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합니다.
2)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신 자들입니다.
3) 꿈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꿈, 환상, 기적, 신비체험등으로 하나님의 말씀 운운하는 자들은 다 거짓입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33-40:거짓 교사들은 말씀을 왜곡하고 거짓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둑질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의 도용, 오용, 남용하는 자들이기에 십계명의 3계명을 범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벌하겠다는 엄중한 심판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말했습니다. 교회에서 참된 교리와 신학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진리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시대에 교회가 진리를 말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믿고 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렘 24

역사적 배경은 바벨론으로 2번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갔을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포로들을 하나님이 잘 돌보시다가 돌아 오게 하시겠다는 것을 좋은 무화과가 담긴 광주리 환상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시드기야와 백성들은 버릴 것을 나쁜 무화과 담긴 광주리로 예언하십니다.
7절: 유다는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렘 31:31절에 예언되어 있고, 이는 신약의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됩니다. 거듭남이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새 마음 새 영으로 새롭게 되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렘 25

때는 여호야김 넷째 해, 느부갓네살 왕 1년째입니다 (1). 이런 정보는 역사적 배경과 시대를 파악하는 데 귀한 정보이니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23년동안, 많은 선지자들을 계속 백성 가운데 보내셔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예언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분순종, 반역, 우상 숭배로 인해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11) (1-14)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만 사역한 것이 아니라 주변 열국들에게도 하나님의 메신저로 사역했고, 그들이 모두 진노의 잔을 마실 것이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됩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그 어떤 인간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악한 바벨론을 들어 유다의 죄를 심판하셨지만, 바벨론의 악을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교만, 악행으로 인해 참혹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렘 26

여호야김 때 예레미야가 다시 제사장들,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1-7). 그러나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8).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죽이려는 잔혹함과 대담함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법정의 역할을 했던 새 대문 입구에서 예레미야를 거짓 기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참 선지자의 운명입니다. 우리 구주께서도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의 모함과 거짓 기소로 죄 없으신 분이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자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들은 간덩이가 부은 자들입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을 했던 우리야를 애굽까지 추격해서 마치 인터폴 적색 수배를 해서 공조로 선지자를 잡아와 죽이는 천인 공노할 범죄를 지었습니다. 당장에 진멸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한 주인이 포도원을 빌려주고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계속 보내지만, 거절하다가 나중에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포도원 농부들의 악함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까지도 결국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을 영원토록 구원하는 일로 바꾸셔서 그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청자와 대적자들은 비신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왕국의 지도자와 백성들이었습니다. 핍박과 박해는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너무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선포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합니다. 비난받고, 떠나고, 반대 당할 각오 말입니다. 누가 말씀 사역이 쉽다고 했던가? 진짜 말씀 사역은 고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를 주며 계속해서 말씀 사역을 포기하지 않도록 이끄는 견인차입니다.

렘 27

여호와께서 유다 주변의 모든 열국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넘겨 지배아래 둘 것이라는 말씀을 선지자가 전합니다. 바벨론을 섬기면 하나님이 그들을 그곳에서 돌보시고 살게 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파멸당할 것이다라는 것이 예언의 골자입니다.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도 동일한 예언을 전하며, 바벨론을 섬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을 이를 부정하고 오히려 바벨론의 압제를 끊고 빼앗겼던 성전 기구와 기물들과 포로들이 돌아 올 것이라 말합니다.
27장은 특히 거짓 예언이 반복해서 나온데, 그 말을 듣고 따라가면 멸망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의 내용은 오히려 매국노, 반역자의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도덕적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내 상식, 내 윤리, 내 정의, 내 나라까지도 부정해야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며, 그것이 복괴 형통의 길입니다.

렘 28

27장에서 거짓 예언을 하는 실물로 ‘하나냐’ 라는 거짓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와 공방을 벌이면서 예레미야의 예언의 내용과 반대되는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나님의 권위를 도용하기까지 합니다 (4).
예레미야서 예언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야 말로 역사의 통치자, 주권자이시며 세계 열강의 흥망성쇠가 주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산다면 지금 전 세계가 돌아가는 패권이나 흐름들에 대한 이해와 미래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냐는 그의 거짓 예언으로 인해 하나님께 죽임 당합니다 (16-17).
사도 바울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갈 1:8)” 고 했듯이 복음을 왜곡하거나 희석시키거나 심판의 메시지 없는 구원이나 사랑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는 더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멸망으로 치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복음과 교리를 듣고 배우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진리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우리는 평생 헌신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렘 29

포로로 끌려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장로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백성들에게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바벨론에서 70년이 지나야 다시 돌아 올 것이니 거기서 집 짓고 농사짓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딤전 2:1-2절에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과 동일합니다 (7).
침략자들의 포로죽에서도 그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터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 사로잡혀간 조선인들이 그곳에 살면서 일본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른 것과 동일합니다. 이성과 상식에 어긋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징벌하시고 원수의 나라를 통해 그 일을 이루셨지만 그 이유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안함을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며, 우리의 선을 위한 것이기에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해야 할 완전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비록 죄로 인해 형벌을 받았을 지라도 회개하고 주를 찾으면 주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만나 주실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아버지께 나아 오는 자를 받아 주시고 사유하여 주시는 자비로우시며 다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거짓 예언으로 주의 백성들을 미혹한 자가 받게 될 심판의 끔찍함이 나타납니다. 진리가 아닌 것, 다른 복음을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는 것 조차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30-32).

렘 30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책에 기록하게 하시는데 그 내용은 구원의 회복입니다. 회복의 내용이 포로 귀환 후를 바라보게 하는데 내용상 포로 귀환을 넘어서는 실질적 성취의 때를 기대하게 합니다.
9절에 다윗 왕을 섬기리라고 하셨지만, 포로 귀환 후엔 왕은 없었습니다. 다윗 왕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회복의 때가 주가 오실 때 (초림과 재림) 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약속의 성취는 예루살렘 귀환과 제2성전 건축에서 이루어지지만 부분적 성취였습니다.
22절의 언약 갱신은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매 주일 예배가 이 언약을 갱신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장들을 오늘의 나의 삶에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도리어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이 우리는 이미 보았으며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복된 자임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제나 언약이 새롭게 갱신되는 은혜의 때를 살아감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더 나은 적용일 것입니다.

렘 31

예레미야 사역 중 뽑고 파멸하는 사역에서 심고 세우는 사역이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다 받은 후 다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옛 언약의 관계를 회복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신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번성하고 번영하며 즐거워 합니다. 우리는 ‘그때에’ (1) 가 언제인지, 언제 이루어 졌는지를 계속 생각하며 읽어 나가야 합니다.
31:31-34절은 아주 중요하고 유명한 단락입니다. 구약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새 언약” 이라는 등장하는 곳입니다.
이 날, 그날이 가리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오순절 성령 강림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여 항상 언약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성령의 중생하게 하심으로 인해 새롭게 된 신자의 상태를 말합니다
새 언약의 결과 여호와께 사죄함을 받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 온 세상에 편만합니다.
예수께서는 성찬의 잔을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 (눅 22:20) 이라 하셨고,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 (히 9:15) 라고 하셨습니다.
옛 언약은 시내산에서 모세의 중보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범죄함으로 언약이 지켜지지 않았지만, 이젠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내주로 인해 영원토록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맺은 언약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구원입니다.

렘 32

시드기야 10년, 느부갓네살 왕 통치 18년째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베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고 예레미야는 그가 전한 말씀 때문에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반드시 바벨론에게 망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3-5).
여호와께서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땅을 예레미야에게 매매하게 함으로, 하나님이 유다를 포로된 곳에서 반드시 돌아 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보증을 하십니다 (6-15).
이에 대해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회복의 약속을 주셨으나 눈 앞의 현실은 바벨론에 의한 패망임을 보고 탄식하는 기도 합니다 (16-25).
하나님의 응답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우상 숭배 행위, 인신 제사, 불순종등을 다시 드러내시며 그들을 벌하시겠다 말하십니다 (26-35).
그러나 주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예루살렘에 안전히 거하게 하시고 다시는 깨어지지 않을 영원한 언약을 그들과 다시 세우시켜 언제나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36-44). 새 언약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포로 귀환에서 1차 성취되었지만, 그것은 일시적, 부분적, 미완성의 성취였습니다. 이 언약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으며 사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건지시고 예수 그리스도, 참 성전되시며 예루살렘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새 언약” 을 맺음으로 완전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구원과 회복과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주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일만 할 뿐입니다.

렘 33

예언의 시기는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여전히 갇혀 있을 때입니다. 유다의 멸망이 코 앞에 있습니다. 이때 그들이 당할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 후, 망한 후에 여호와께서 회복하시고 구원하실 그날 그때를 예언하십니다. 회복의 내용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 예언을 이룰 존재는 다윗에게서 나온 한 공의로운 가지 (15절) 이며,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입니다. 그가 다시 회복할 나라는 공의와 정의가 강처럼 하수처럼 흘러 가는 곳입니다. 이 약속은 당연히 메시아의 오심 (초림과 재림) 으로 성취되었고 될 것입니다.

렘 34

본 장의 예언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를 침공할 때 임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1). 그리고 이것을 시드기야 왕에게 전합니다 (4, 6). 침울하고 슬픕니다. 이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 (하나님의 성품인) 의 불순종이며, 이는 곧 마음의 불순종이었습니다.
다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같은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았지만 자유롭게 해 주기로 언약했다가 다시 어기고 종을 삼은 죄를 질책하며 그것 때문에 바벨론의 손에 점령당할 것이라 말하십니다. 18-20절의 내용은 창세기 15장에서 (10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형태와 같습니다. 언약을 맺고 쪼갠 고기 사이로 두 당사자 지나갑니다. 언약을 깨뜨린 측은 쪼갠 고기처럼 죽어야 합니다. 유다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으므로 쪼갠 새와 짐승처럼 죽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일의 벌이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파기한 언약에 대한 형벌을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지심으로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범하는 죄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여겨야 하는 지에 대해 경각심을 깨우침과 동시에 우리 대신 쪼개어지셔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에 한 없는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분의 죽음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렘 35

다시 예언의 시기는 뒤로 돌아가 여호야김 때입니다 (1).
레갑 사람들 (겐 족속, 가나안 정복시 항복했던 족속) 의 순종의 이야기입니다. 레갑 가문의 자손들은 선조 요나답의 명령에 끝까지 순종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들과 유다 백성들을 비교하며 유다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 말하여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우상숭배를 지속하였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자초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최후까지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본을 보인 레갑 자손들에게 영원히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19).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얼마나 귀히 보시며 영원을 결정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장입니다.

렘 36

예레미야가 예언한 모든 내용들을 바룩에게 불러주어 두루마리에 기록하게 한 뒤에 바룩이 고관들과 백성들, 그리고 나중에는 여호야김 왕에게도 낭독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두루마리를 읽는 족족 칼로 찢어서 화로불에 던져 태워 버립니다. 간덩이가 부어도 보통 부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발톱의 때만큼도 취급하지 않았던 이들은 하나님께 대해 그런 태도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야김의 죄에 대해 재앙을 선고하시고 예레미야는 다시 바룩에게 불러주어 그의 예언을 기록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그에 대한 반응은 하나님에게 대한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마음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대해야 겠습니다. 성경을 낭독할 때 회중이 일어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하겠다는 마음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비록 두루마리를 찢지는 않을 지라도 그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여호야김처럼 무시하고 아예 듣지 않는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고 우리의 태도를 교정해 나가야겠습니다.

렘 37

시드기야 왕 때로 갑니다. 당시 정황은 갈대아 군대(바벨론) 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애굽 군대가 오자 갈대아인이 떠납니다. 유다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고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을 무시하고 애굽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요나받의 집 웅덩이에 가두어 두껑을 덮어버립니다.
옛적에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죽이려 했던 형들이나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은 바벨론 왕이나 동일한 패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를 박해하고 대적합니다. 이는 예수를 대적하던 유대인과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최종 재현되고 하나님이 보낸 궁극적 선지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성도를 대적하는 세상 (사탄의 통제받는)이 그 일을 주님 오실 때까지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박해받고 고난당하며 거부당하는 것입니다. 무고한 자가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경건하 자의 삶의 패턴은 주님 오실 때까지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때문에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며 오히려 예수의 이름때문에 받는 핍박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내 삶에 이런 핍박이 (적어도 내적으로) 없다면, 나는 주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렘 38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 사역으로 인해 구덩이에 갇히지만 왕궁 내시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건짐 받아 시드기야 왕 앞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이 시키는 대로 왕과의 대화를 숨김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감옥 뜰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장들에서 선지자가 그의 예언 사역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고생의 삶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힘든 삶에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며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신자로 산다는 것,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것 자체가 고생의 음식을 마시는 것과 같음을 느낍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의 내용은 당시 상황에서 매국노 취급을 받기에 최적입니다. 평안을 예언해도 부족한데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당하지 않게 그들에게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독립 운동을 해도 모자란 판에 적국에게 붙어서 목숨을 구하라는 것은 구차한 삶으로 까지 여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핵심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의 형벌에서 벗어날 길을 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심판을 유보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결국 그들의 완고하고 악한 불순종으로 인해 예루살렘이 불타고 유다 왕국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그들을 보전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그러셨기에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패역한 예루살렘을 보시며 탄식하셨던 예수님이야 말로 참 선지자이셨습니다. 궁극적 선지자를 죽인 예루살렘은 예수님 (선지자)의 예언대로 AD 70년에 티투스 장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참 성전되신 예수님은 자신이 무너지고 다시 살아나셔서 새성전을 지으시고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주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고 계십니다.

렘 39: 유다의 멸망 (B.C 586)

1-10절
시드기야 왕 9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입니다.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 안심하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던 왕과 신하들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가 잡힙니다. 왕의 아들들은 죽임당하고 시드기야는 눈이 뽑히고 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갑니다. 무소유의 빈민들만 유당 땅에 남겨두고 유다 왕국을 황폐한 곳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부한 유다의 말로가 참으로 구슬프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자초한 심판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감옥 뜰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풀려나서 남은 빈민들 가운데 삽니다 (11-14).
15-18
예레미야를 죽이려할 때 왕에게 간청해서 살려 주었던 에벳멜렉은 바벨론 침공시 죽지 않고 살 것임을 예언했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그의 생사가 결정되었듯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영원한 생명과 죽음을 결정할 것입니다.
에벳멜렉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들 듣고 믿었고 믿음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18).

렘 40

느부갓네살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풀어 주며 세 가지 옵션을 줍니다. 바벨론으로 같이 가면 잘 대해 줄 것이고 아니면 유다에 남든지, 아니면 가고 싶은 다른 데로 가든지.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유다 땅에 남기를 결정합니다. 실상은 예메미야가 진짜 애국자이죠. 자신의 영화를 위해서라면 바벨론으로 가서 사역에서 은퇴하고 말년을 좀 안정적으로 살 수도 있었을 겁니다 (1-6). 신자는 개인의 부귀영화나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소명을 따라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왕이 유다를 침공한 후 그곳에 통치자로 그다랴를 세워 바벨론을 섬기게 합니다. 그댜랴 밑으로 흩어졌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미스바로 모입니다 (7-18).
참 서글픕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에 의해 찬란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몇 백년을 가지 못하고 이렇게 몰락해 버리다니요! 이 모든 심판은 종국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이 당할 심판의 미리보기 입니다. 우리 모두 더욱 더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당한 종말의 끔찍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의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들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늘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렘 41

패망한 유다 땅에서 또 다시 대살육이 발생합니다. 악의 화신과도 같은 이스마엘이 바벨론이 위임한 그다랴와 그와 함께 한 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구덩이에 시체를 던져 버립니다 (1-10).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군대가 이스마엘에게 사로 잡혀 갔던 자들을 구해 주지만, 바벨론이 세운 그다랴를 이스마엘이 죽였기에 두려워서 애굽으로 망명을 하려합니다 (11-18). 그다랴가 충신인 요하난의 간언을 들었더라면 (40: 13-16) 이런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와 악이 빚어낸 살육극을 보며, 하나님을 떠나 악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얼마나 지옥같은 지 봅니다. 답은 하나님입니다. 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에는 모든 악한 자들이 사라지고 의와 공평과 정의와 사랑만 가득한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날을 학수 고대합니다.

렘 42

유다의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를 찾아가서 그들이 가야 할 길과 할 일을 알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3). 십일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가 전합니다. 그 내용은 바벨론을 섬기면서 유다 땅에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애굽으로 가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곳으로 가면 모두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알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결코 순종할 마음이 없어 불순종하여 죽게 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21-22).
예레미야 42:6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이들은 순종과 복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말뿐이었습니다. 우리도 머리로는 잘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이며 형통의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그 복과 형통은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영혼에 관한 것이며 영원의 복과 형통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도 입술의 고백과는 달리 마음으로 애굽이라는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그 길은 망하는 길이며 심판의 길입니다. 끊임없이 말씀으로 돌아와서 순종하고 하나님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렘 43

아사랴, 요하난 등 유다의 남아 있는 자들이 교만하게 선지자의 말을 거부하고 다 데리고 (사실은 끌고) 애굽 땅 다바네스로 갑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이 다시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재앙을 선언하십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악하고 불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나님의 왕국이 무너진 걸 목도했음에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또 다시 심판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바른 의미를 확정하고 말씀을 재단합니다. 그리고 자기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으로 갑니다.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이나 남아있게 된 자나 모두 소망 없습니다. 인간의 전적 불능, 전적 부패 교리는 진정 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몸 부림 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금 깨닫고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렘 44

비록 유다가 패망해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갔지만, 또 유다는 그들의 지배 아래 속주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마련하신 살 길은 그들에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들을 돌보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살아 남은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심판 받아 죽은 모든 유다인들이나 끌려간 유다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들을 애굽까지 추격하셔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너무 오래동안 참으시며 그들의 돌이킴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15절: 애굽으로 간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아내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냥 두었던 남편도 동일한 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의 남편이야말로 아내의 신앙 생활에도 영적인 책임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남자든 여자든 너무 당당하게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겠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섬길 때 그들이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이방의 신을 섬길 때는 풍부하고 복을 받고 재난도 당하지 않았다고 이유를 댑니다 (16-19).
이게 바로 기복 신앙, 번영 신학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이 되어가는 이유이며, 하나님을 현실의 복을 받기 위해 신앙하는 자들이 이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고통을 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얼마든지 버리거나 세상의 것들을 함께 추구하는 양다리를 걸치며 살게 됩니다. 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반면교사처럼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는 두 가지 반응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버리고) 세상의 신 (물질, 안락, 쾌락, 권력, 성공, 명예) 을 좇아 갑니다.
회개하고 주께 돌아와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애굽으로 간 남은 유다인들 역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보내 애굽 (바로 호브라 왕) 과 함께 진멸시키겠다는 심판의 예언입니다 (20-30).
44장 20절부터 51장까지는 이사야서처럼 주변 열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마지막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벨론조차도 자신들의 교만과 죄악으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렘 45

다시 여호야김 넷째 해로 돌아갑니다 (BC 605년).
예레미야가 그의 대필자 바룩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 준 내용입니다.

렘 46-51

46-51장은 이방 나라의 멸망 예언입니다.
46장
애굽이 받을 심판의 예언 (46)
47장
블레셋이 받을 심판의 예언
48장
모압이 받을 심판의 예언입니다.
모압이 받을 심판의 분량은 상당히 깁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원수로서 많이 괴롭혔던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난 아들이 조상인 이들은 요단강 건너기 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고, 이스라엘을 유혹해 공동체 전체를 음행하게 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모압은 이스라엘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증조 할머니 (성경의 계대를 문자적으로 본다면) 인 룻이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49장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과 하솔, 엘람이 받을 심판의 예언
암몬 역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딸에게서 낳은 암몬을 조상으로 둔 민족이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과정과 그 이후 이스라엘 왕국이었을 때도 대적자였습니다.
에돔은 이삭의 배다른 형이죠. 이스마엘의 후손인데 역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민족입니다.
다메섹은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아람의 수도로서 때로는 용병으로 때로는 침략국으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열방들을 모두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왕국을 대적하는 민족들을 최종적으로는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 주며, 종말의 그림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세계의 민족과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에 대한 프리뷰입니다.
50-51장
바벨론이 받게 될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50장은 46절, 51장은 64절이나 되는 가장 많은 분량을 오로지 바벨론이 당할 멸망과 받을 심판에 대해서 기술합니다.
역사적으로는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이 완전히 멸망당합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 포로 70년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성전을 재건하게 됩니다. 이 때 활동했던 사람이 다니엘, 에스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세상에게 행해질지를 보여 줍니다. 특별히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한대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강하고 부하며 사치와 음란과 쾌락으로 가득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심판이 음녀 바벨론의 패망에 대한 것 (계 18장) 과 대칭을 이룹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적 장르와 메시지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함께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철저함, 무서움과 두려움을 강조합니다. 바벨론의 심판의 메시지는 바벨론의 포로로 살던 포로민들에겐 자기들을 압제하는 바벨론의 멸망은 큰 소망과 위로가 되어 포로민의 삶을 인내로 견딜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주의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은 이 땅을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 나라 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주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살게 될 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평안을 주는 복된 말씀입니까!

렘 52

마지막 장입니다. 주변 열방과 최후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함으로 위로를 주었다가 다시 39장에서 기술한 유다의 멸망의 때인 시드기야 왕의 시기로 돌아가며 끝을 맺습니다. 39장보다 더 상세하게 유다 멸망의 참삼을 그립니다.
시드기야 왕과 아들들을 사로 잡아가서 왕이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가져가고 금, 은, 놋을 다 벗겨버리고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들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야말로 핵폭탄을 터뜨린 것처럼 도시 전체를 초토화 시켜 버립니다 (4-23).
24-30절에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를 끌고간 때와 포로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31-34절에 잡혀갔던 여호야긴 왕이 다시 바벨론에서 왕 대접을 받았더라로 끝내면서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소망의 불씨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여호야긴 왕의 자손 중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에 귀환해서 유다 총독이 되어 성전과 유다를 재건합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의 후손에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으로 이어지고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 되게 합니다. 결국 포로된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남긴 소망의 불씨는 메시아 예수에게로 이어져 온 세상의 유일하며 참된 소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우리의 소망, 예수 우리의 구원자, 온 땅의 구주, 만왕의 왕이십니다.
참고로 52장과 같은 역사적 배경에 쓰여진 다른 성경과 평행 본문입니다. 해당 성경을 찾아서 비교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겁니다.
렘 52:1-11⇒ 왕하 24:18-25:7
렘 52:12-27 ⇒ 렘 39:1-7
렘 52:12-27 ⇒ 왕하 25:8-21
렘 52:31-34 ⇒ 왕하 25:27-30